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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 달 밝은 불가리아의 밤

by essay6653 2025. 3. 21.

불가리아의 밤

 

 

휘영청 달 밝은 불가리아의 밤

 

 

불가리아는 꼭 동남아 같았다. 허름한 시멘트 건물 일색에 이렇다 할 유적지도 없다. 유럽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천카페 나 오래된 석조건물, 새파란 하늘에 피어나는 짱짱한 구름 그 어느 것도 없다. 어쩌면 잔디나 구름도 그렇게 다른지, 색깔은 흐릿하고 모양은 빠진다. 심지어 갈매기까지 그악스 러워서, 여기 갈매기는 우아하게 창공을 선회하는 게 아니 라 몰려다니며 꿱꿱거리고, 공원의 쓰레기통까지 뒤진다. 까마귀나 거위나 개구리처럼 시끄럽기도 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불가리아 제3의 도시 ‘바르나’이지만 수도인 ‘소피아’ 가 여기보다 초라하다는 블로거도 보았으니 큰 차이는 안 날 것이다. 딸이 이곳에서 카이트서핑을 배우려고 왔는데, 연락을 늦게 받는 바람에 결렬되었다. 이맘때는 바람이 안 맞아서 좀 더 남쪽으로 간단다. 우리는 이미 8박이나 숙소 예약을 한 터, 볼 것은 없지 정은 안 가지 하도 투덜댔더니 딸이 그 만 좀 미워하란다. 시간 난 김에 자전거도 타고, 캐리어도 사고, 그럭저럭 닷새가 지났는데 중요한 문제가 터졌다. 딸이 이동하는 데 지쳤는지 불가리아 이후의 일정을 가까운 곳에서 때우고 싶 어 하는 것. 더 이상 비행기를 타기 싫단다. 2014년 3개월 예정으로 동유럽을 돌던 때였다. 나는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지만, 일일이 교통편과 숙소 예약하랴 나 인솔하랴 딸이 지칠 만도 했다. 그래도 나는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풍요로운 유적 과 자연과 풍물을 지닌 이탈리아를 구석구석 누비고 싶고, 그게 어려우면 다시 런던으로 유턴해도 좋을 듯 싶었다. 궁 리 끝에 베네치아가 떠올랐다. 베네치아, 경이로움과 탐미 와 환상의 절정! 세계인의 소풍지! 산마르코광장 앞 해안으 로 다가오던 거대한 크루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해안에 가득 찬 사람들과 크루즈 갑판을 새카맣게 채운 승객들이 서로 손을 흔들던 장면은 내 인생에 가장 환상적인 순간으 로 각인되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고, 삶에 이런 순간이 있을 수 있구나! 다시 베네치아에 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딸은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남은 기간을 둘로 나누어 각자 가고 싶은 곳을 하나씩 정하자는 내 논리에 무 리가 없으니 대놓고 반박도 못 하고 끙끙 앓는 눈치였다. 그 렇게 은근한 긴장이 흐르기를 며칠, 내 마음이 어떻게 돌아 섰더라? 가보지 않은 곳을 뚫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싶고, 그 동안 딸이 애쓴 것 생각해서 한 수 접어주고 싶기도 한 거기 어디였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내 입에서 베네치아 안 가도 돼,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딸이 호들갑을 떤다. 그동 안 신경 좀 썼다는 얘기다.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좋아하더 니, 베네치아 안 가는 선물로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냉큼 내 등으로 간다. 당최 젊은 애답지 않게 매서운 데가 있는 딸은 악력도 세 서 마사지를 곧잘 한다. 산악자전거 타다가 허리를 삐끗해 서 카이로프랙틱을 받으러 다니더니 요령을 익힌 것이다. 전에도 내 어깨가 뭉쳤다고 간간이 마시지를 해주고 나면 제법 부드러워진 기분이 들곤 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풀 서비스다. 목이며 어깨, 양팔의 압통점(통증을 유발하는 포인 트)을 찾아 자극을 주면서 풀어주는 방식이니, 내 입에서는 아이구 아파! 소리가 멈출 새가 없다. 손아귀 힘도 장난이 아닌데 팔꿈치까지 이용해서 압통점을 비비고 눌러대니, 어 구구구! 비명소리가 고문이나 구타의 형국과 다름이 없다. “베네치아 안 간다고 말해! 비행기 안 탄다고 말해!” 힘도 안 드는지 연신 손을 움직이면서 입으로 장난을 치 는 딸이 놀랍고 웃겨서, 나도 맞장구를 친다.  “베네치아 안 갈게요. 비행기 안 탈게요!” 창밖으로 휘영청 달이 밝은데 그렇게 한참을 놀았다. 나 는 엎드린 채로 시술(?)을 받는 것도 힘이 드는데 딸은 지치 지도 않고 몇 바퀴나 압통점을 돌고 또 돈다. 도대체 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내가 한 가지를 볼 때 딸은 서너 가지 이상을 본다. 걱정도 많고 궁리도 많은데, 경제관념은 또 얼 마나 철저한지 내 돈 아니었으면 서러움깨나 받았을 것이 다. 내가 사소한 장면에 감탄하며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 걱정으로 무장한 딸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오늘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마음이나 의지, 처세, 경제관념, 심지 어 체격까지 어느 것 하나 절도가 없고 물러터진 내가 민망 해지는데, 딸이 등에서 내려오며 한마디한다. 어지간히 좋 았던 모양이다. “베네치아 안 가면 날마다 싸~ 비스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