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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왕국, 태국 매홍쏜

by essay6653 2025. 3. 13.

햇살왕국, 태국 매홍쏜

 

햇살왕국, 태국 매홍쏜

 

시내를 슬슬 산책하고 있는데 공항이 나타났으니 지역이 얼 마나 작다는 얘기인가. 게다가 그 공항이라는 곳에 4차선 도로를 한 토막 내놓은 것처럼 작은 활주로밖에 없다. 그런 데도 알록달록한 비행기는 가끔 소리도 없이 왔다 가니 궁 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경비행기라서 소리가 안 난다고 치 고 공항 사무실 하나가 없단 말인가. 관제탑을 찾아 골목을 한참 걸어간다. 뜰이 있는 집에는 꽃나무가 무성하고, 마당이 없는 집에는 화분 몇 개라도 놓 인 집들 사이에, 겉모습만 봐도 장인일 것 같은 할아버지가 092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힐링 093 재봉틀로 수선 일을 하고 있고, 식당이 몇 개 숨어 있다. 골 목 끝에 공항 건물이 있다. 조촐한 건물이 활주로와 기역 자 로 꺾어져 있어서 높은 전망대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관제탑을 찾아다니는 엉뚱한 일로 하루를 보내도 되는 것이 여행자의 일상이다. 여기는 태국의 매홍쏜. 치앙마이 에서도 많이 떨어진 빠이에서 버스로 두 시간 반을 더 갔다. 미니버스를 타고 운무를 품고 있는 골짜기를 돌아 돌아 내 리는 순간 빠이와 비교할 수 없이 청량한 공기가 몸을 감싼 다. 버스터미널 주변에 이렇게 상점이 없는 곳도 없으리라. 한적한 시가지에 햇살만 고즈넉하다. 마을 복판에 작은 호수가 있다. 호수를 둘러싼 마을이 중 심지요, 그 마을의 끝에 공항까지 있으니 아기자기하기가 소인국 수준인데, 나는 내 맘대로 이곳을 ‘햇살왕국’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밝고 화창한 햇살이 주인이고 사람들은 있 는 듯 없는 듯하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리액션이 크다. 차를 권하기도 잘하고, 여행자에 대한 관심을 듬뿍 드러낸다. 캄 보디아에서는 아이들이 집요하게 구걸을 하는 바람에 진저 리가 처졌고, 베트남에서는 개발에 대한 활기로 시끌벅적했 다면, 이곳은 도시 전체가 명상타운 같다. 장사꾼이든 택시 기사든 호객이 없고, 여행자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방콕과 파타야의 번잡함을 접했을 때 나는 매홍쏜을 떠올리며 태국이 그처럼 고즈넉한 면모를 갖고 있 다는 것을 기억했다. 호수 주변에 ‘폴리스’라는 간판을 단 건물을 보고는 좋 아서 싱글벙글 웃고 다닌다.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의 앙증맞 은 ‘폴리스’는 여행안내소라면 어울릴 분위기였다. 이런 곳 에서는 당최 무슨 일을 할지, 다른 세상에 온 것이 분명하 다. 전에 튀르키예의 오지에서 소방차가 와서 전봇대 높이 달린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을 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 밤이면 호수 주변에서 야시장이 열리는데 야시장이 이렇 게 조용한 데도 없을 것이다. 온갖 꼬치요리를 굽느라 연기 가 피어나고, 동남아 특유의 직물로 만든 옷과 가방이 즐비 한 것은 다른 곳과 같은데, 집에서 직접 준비해서 나온 듯한 음식이 많아서 정겹다. 흑미로 만든 찹쌀떡을 잘라 숯불에 구워 먹으면 구수하다. 태국에 넘치는 향신료 맛에 지칠 때 우리네 떡과 똑같아서 좋다. 빠이에서는 네모난 찹쌀떡이 규격화되어 공장식 느낌이 짙었다면, 여기서는 둥글고 두툼 한 모양에서 풍기는 수제의 분위기가 미덥다. 바나나잎으로 재빠르게 배 모양을 만들어 구운 찰떡을 담고 꿀을 뿌려주 는데 일회용 그릇으로 손색이 없다. 크리스마스이브를 기해 소수민족 학생들의 축제가 열렸 다. 학교별로 부스를 마련해서 기념품을 팔더니 밤이 되자 장기자랑이 열렸다. 무거워 보일 정도로 터번을 휘감거나 목에 잔뜩 링을 낀 ‘롱넥족(카렌족)’이 단연 눈에 띈다. 어쩌 다 TV에서 접하면 세상에서 제일 잔혹하고 어이없는 문명 이라고 분노하게 되던 풍습을 가진 소수민족이 눈앞에서 움 직이니 신기하기 짝이 없다. 낮에는 어떻게든 사진 한 장 찍 고 싶어 롱넥족 좌판에서 허브 연고를 겨우 하나 골라 샀는 데(어쩌면 그렇게 필요 없는 것만 파는지!), 정작 아이들과 지도교 사는 사진을 찍으라고 천하태평이다. (지도교사는 목에 링을 끼 지 않았다.) 장기자랑을 할 때도 제일 현대적이고 고혹적인 춤사위를 선보이는 통에 ‘롱넥’ 풍습에 대해 생각이 바뀔 정도다. 문 화는 문화다. 평생 한 번 부딪힐까 말까 한 여행자가 남의 풍습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비 합리적인 풍습이라 해도, 저렇게 예쁘고 발랄한 아이들이 있는 부족이라면 스스로 고쳐 나가리라 믿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아이들이 건강해 보였다. 호숫가 좋은 자리에 앉아 닭다리에 쏨땀(그린파파야샐러드) 을 먹는다. 꽈광! 갑자기 대포 소리가 나더니 불꽃놀이가 시 작된다. 사람들의 환호에도 아랑곳없이 불꽃놀이는 딱 다섯 번만 하고 멈춘다. 불꽃놀이가 지폐를 태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데 짧고 강하게 축제 기분을 내면 됐지…. 이미 사랑 에 빠진 여행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대신 간간이 풍등 이 날아오른다. 밤이 깊으니 사원의 불빛이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호숫 가 중심을 차지했으니 아마 이 절은 꽤 유명한 절일 것이다. 산 정상에 있는 사원에서도 불빛을 밝혀놓아서 하늘에 떠 있는 것 같다. 낮에는 마냥 깨끗한 햇살이 빛나고, 밤에는 야시장까지 조용한 마을에 오고 보니 없던 신심이 돋아난 다. 땅과 하늘에서 나를 위해 불을 밝힌 누군가가 느껴져 마 음이 차분해진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조용히 북돋아주는 힘을 느낀다. 다시 한번 살아갈 힘이 조용히 충전된 것 같은 밤이다. 동화같이 작은 활주로에서 떠오른, 만화처럼 알록달록한 비행기는 타이의 ‘녹에어’라고 한다. ‘녹’의 의미가 ‘새’라 는 것이 사랑스러워 나는 좋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