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하고 다양하고 넉넉하고 호쾌한 튀르키예
튀르키예에 네 번이나 갔지만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 정도 로 튀르키예가 광활하고 복잡하고 다층적이라고 느낀다. 한 반도의 3.5배 넓이에 8000만 인구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이 탁 트이는 기분. 나는 ‘금사빠’ 자질이 다분한데 튀르키 예는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본 야경만으로도 나를 사로잡 았다. 이스탄불의 야경은 이스탄불이라는 지명에서 풍기는, 고색창연하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에 값하고도 남았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해안선이 구슬 목걸이를 하고, 막대 모양의 등불로 구획을 지은 도로에는 수많은 개똥벌레가 빠르게 움직이고, 나머지 여백은 온통 황색, 은색, 녹색, 파란색의 전구로 수 를 놓았다. 과도하게 화려하지 않고, 고만고만한 전구들이 낮은 자리에 촘촘하게 틀어박혀 빛나는 모습은 도로와 언덕 과 골목을 모조리 반짝이는 보자기로 덮어버린 것처럼 세련 되고 정교하여, 민주적이기까지 했다. 재력과 안목을 두루 갖춘 여인의 패물함이 쏟아졌달까, 졸부는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고아한 영롱함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자를 위한 조 명쇼에 나는 탄성을 질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배경 속에 돌 연 나타난 불꽃도시가 어찌나 은은하고 화려하고 다정하게 신비로웠는지 ‘동서, 고금, 성속이 만나는 도시’로 일컬어지 는 이스탄불의 첫인상으로 충분하다.” 2012년 튀르키예에 대한 첫인상을 그렇게 써놓았네. 사 교적이지 않은 우리 모녀로서는 드물게 팀을 모아서 갔던 곳도 튀르키예이다. 글쓰기 여행을 내걸고 팀을 모았는데 30대 부부와 중년 여성 두 분이 손을 들어주어서 여섯 명이 한 달 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했다. 내가 글쓰기 선생이고 딸 이 실무자로서 주최 측인데 그다지 살갑게 일행을 챙겼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특히 나는 사람하고 사이에 무조건 거 리를 두어야 편안한 성향이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의아하 고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딸과 둘이 다니다가 여럿 이 어울릴 때만 나올 수 있는 분위기를 누린 것은 아주 색다 른 경험이었다.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의 색다른 맛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3층짜리 좁게 올라간 아파트를 통 째로 빌렸다. 1층에 침실 하나와 샤워실, 2층에 부엌과 침실 하나, 3층에 침실 두 개로 이루어진 구조로 나는 딸과 함께 2층에 자리 잡았다. 여섯 명이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과 구수한 숭늉이 있는가 하면, 빵과 스크램블에그, 체리잼이 등장한다. 나는 월남쌈을 준비 했다. 노력 대비 최고의 비주얼과 맛을 자랑하는지라 내가 편애하는 월남쌈! 멤버 하나가 팩소주를 다섯 개 가져왔다. 맥주나 와인은 한 잔씩 해도 소주는 안 마시는데 마침 토 닉워터가 있어 섞으니 멀끔한 칵테일이다. 순하고 부드러워 술술 넘어간다. 남편이 소주가 열 개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 고 했는데 절반 딱 잘라 다섯 개만 가져왔다던데, 좀 아쉬웠 다. 다른 멤버는 빈약한 그릇 몇 개를 다기처럼 다뤄가며 직 접 말린 국화차를 만들어주는데 어찌나 은은하고 향기로운 지 내가 가져간 티백 마시려면 하품 나오게 생겼다. 저마다 장에서 사 온 사과말랭이와 토마토 등으로 냉장 고가 가득 찼다. 그러니 내가 산 한 가지만 먹는 것보다 얼 마나 다채롭고 풍성한가! 남들은 이미 소싯적에 깨달은 것 을 육십이 되어서야 깨닫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매일 저녁 그날 사진 찍은 것을 놓고 감상을 나누고 글쓰 기 수업도 했다. 카파도키아에서 점프샷을 찍고, 그리스로 가는 크루즈를 탄 것도 그때이다. 시데의 유명한 해변 신전 에서 수업을 할 때는 벅찬 감회가 올라왔다. 다들 풍경에 정 신이 팔려 수업은 뒷전이었지만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기보 다 더불어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중시하는 나로서 는 먼 곳까지 날아와 수업을 하는 것이 마냥 좋았다. 튀르키예에는 내 집에 온 손님을 정성을 다해 환대하는 문화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와 후식이 발달했 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공기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것 같은 차이. 노천카페와 시장 좌판에, 배를 타면 좁은 난간에, 손 님을 기다리는 펜션 주인이 걸터앉은 문지방에, 온갖 곳에 차이가 있었다. 한번은 버스로 이동 중에 휴게소에 내렸는 데 사람들이 일제히 차이에 각설탕을 넣고 휘젓는 따그락 따그락 소리가 좋아서 웃음이 터졌다. 잘록하게 허리가 들 어간 작은 컵에 담긴 은은한 위스키 색깔의 차이, 고향의 맛 처럼 익숙하고 정다운 모양에 소리를 더하는 순간이다. 그 많은 디저트카페에서 보는 후식도 마찬가지. 이스탄불에는 두 집 걸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디저트카페가 많은데 수없 이 많은 종류의 알록달록한 후식이 거리의 색깔을 만든다. 그들은 다양한 후식을 통틀어 ‘딜라이트(delight)’라고 부른 다. 지극한 기쁨.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마음에도 잔잔 한 기쁨이 차올랐다.
글쓰기 여행이라는 지극한 기쁨
무조건 혼자가 싫은 사람도 있고, 훈수 두거나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관계를 조종하거나 지배 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온전히 어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그런 자질을 갖고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렇기에 글쓰기를 매개로 만난 사람들에게 더욱 책임감을 갖 게 된다. 한 달이나 여행을 같이 다닌 사람들과 막역한 사이 가 되지는 못했지만 함께한 장면을 가장 오래 기억하는 사 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수시로 창틀에 새가 내려와 앉던 이스탄불의 첫 집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우리 일행이 전 세를 냈기 때문이다. 멀고 낯선 나라에 ‘우리’가 거점을 갖 고 있다는 것이 든든하고 뿌듯하고 참신했다고 할까. 타고 난 독립군 체질인 내가 글쓰기 여행을 몇 번 더 하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글쓰기와 여행이야말로 내가 아는 지극한 기쁨(delight)이니 좋은 것 두 가지를 합해 놓으면 얼마나 더 좋으랴. 팀 여행을 다녀온 지 석 달 만에 모녀는 다시 튀르키예로 날아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어떻게 그렇게 의기투합해서 돌아다녔는지 놀랍다. 새록새록 기억이 나는데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2015년 시리아의 분위기 가 흉흉했는데도 튀르키예 동부로 방향을 잡아 거의 조지아 접경지역까지 갔기에, 흔치 않은 여행지의 배경과 정말 그 런 시절이 있었는지 비현실적인 느낌이 딱 어울린다.
아나톨리아! 남의 땅덩어리 이름에 가슴이 떨리다
튀르키예 식당에서는 빵이 공짜다! 우리네 식당에서 음 식값에 밥값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별일도 아니건만, 테이블마다 원통형으로 푸짐하게 쌓아놓은 바게트(튀르키예어로 에크멕)를 볼 때마다 나는 행복해졌다. ‘음식이 공짜’라 는 현상은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대한민국을 점령한 물신주 의에 쩐 눈으로 볼 때 세상 어디에도 없는 파격이자 풍요이 며,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넉넉한 성정을 가졌을지 짐작 이 가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튀르키예는 식량 자급이 가능 한 나라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는 2021년 기준 식량자급률 40.5퍼 센트, 산정 방식에 따라 수치의 차이가 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38개 국가 중 최하위인 것은 확실한 듯.) 동부에서 광활한 경작지를 확인했을 때 남다른 감회가 인 것도 그래서였다. 튀르키예의 저가항공 ‘페가수스’ 편으 로 이스탄불에서 시바스로 가는 중이었다. 꼬박 한 시간 동 안 산악 구릉지대가 펼쳐지는데 실로 스펙터클했다. 나무라 곤 한 그루도 없는 누런 땅이 높으면 산악이요, 낮으면 구릉 이고, 골짜기가 모여드는 아늑한 곳에는 마을이 보이기도 했다. 아나톨리아! 남의 땅덩어리 이름에 가슴이 떨려왔다. 이런 대륙을 가진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 사이에 기질의 차이가 없다면 이상할 것이다. 목적지인 시바스에 가까워 오면서 구릉 위에 정교하게 나뉜 조각보도 볼만했다. 간혹 나무가 보일 뿐 여전히 초록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는데, 내려서 보니 밀밭 같은 데 9월 초에 이미 다 벤 상태였다. 시바스에서 하루를 묵고 버스로 에르진잔으로 가는데 이 번에는 눈앞에 똑같은 평원이 펼쳐진다. 하루 전에 창공에 서 내려다본 길을 버스를 타고 눈높이를 맞추니 이 또한 감 격스러웠다. 맞아, 맞아! 저렇게 정교한 물결무늬 산자락이 있었고, 이렇게 거친 구릉도 많았지. 간간이 보이던 마을은 이런 모습이었구먼. 풍경이 3D로 보였다. 한 집당 산등성이 하나씩 경작하나 싶을 정도로 집이 드 문드문 있었다. 튀르키예에서 왜 빵이 공짜인지를 알 것 같 았다. 풍경 또한 에크멕만큼이나 풍성해서 나는 3시간 20분 동안 질리지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운 좋 게 앞 좌석에 앉은지라 우등버스의 커다란 통창으로 온갖 형 태의 산과 언덕과 평원이 지나갔다. 산속에 있는 외딴집을 보면, 사방으로 수백 킬로미터가 밀밭인 곳에서 사는 삶은 어떤 것일지 섣불리 쓸쓸하다거나 고달프다고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평원에 한두 기의 묘로 남 은 것을 보면 사는 게 뭘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튀르키예가 유프라테스강의 발원지라는 데 놀라 거기까지 갔다. 케말리에 카란륵 협곡의 뿌연 회백색 강줄 기가 초라할 정도로 좁아서 당황스러웠지만 그 이름도 찬란한 유프라테스강이다. 강폭은 좁지만 튀르키예 동부에서 발 원하여 이라크, 시리아로 흘러가 티그리스강과 합류하여 메 소포타미아문명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끈질긴 생명의 강이 라 하겠다. 주변에 오염 요인이라곤 없이 원시 자연뿐이니 물 색깔이 희뿌연 것은 아마 석회성분이 많은 탓인 것 같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곳곳에서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만나는 것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원형극장과 목욕탕, 고급 주택가, 심지어 유곽 터까지 남아 있는 튀르키예 최대의 고 대도시 에페스가 그렇고, 튀르키예의 최고봉 아라라트산 (5185미터)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 이란다. 이만하면 태초의 땅 아닌가!
손님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튀르키예는 이렇듯 장엄하고 다양하고 넉넉하고 호쾌했 다. 다 있었다. 그러니 여한이 없을 때까지 이 세상을 맛보 고 싶어 하는 내가 혹할 수밖에. 이렇게 중층적인 매력을 가 진 곳이 쌀쌀맞다면 그림의 떡일 텐데(로마의 커피숍과 숙소에 서 심하진 않아도 분명히 무시를 받았다) 손님을 신이 보내준 선 물이라고 생각한다는 튀르키예 사람들답게 우리는 어디에 서나 후한 대접을 받았다. 길을 물어보면 다른 사람에게 물 어서라도 끝까지 데려다주었고, 모르는 사람인데도 차 한잔 하고 가라고 종종 붙들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야외에 놀 러 나오면 숯불을 피워 닭고기를 굽고 그 불에 차이를 끓인 다. 아시아지구 해안에서 어느 가족이 커다란 석쇠 가득 닭 고기를 굽고 있는 것이 탐스러워 “와우!” 했더니 하나 먹겠 느냐며 안주인이 권하는데 그냥 지나친 적이 있다. 그랬더 니 이 분 보소, 우리가 한창 걷고 있는데 꽤 멀리까지 넓적 한 빵에 닭다리 하나를 얹어 들고 쫓아온 것이다. 그런 경험 이 있기에 에르진잔의 어느 폭포(Girlevik)에서는 차이 한잔하 라는 가족의 권유에 스스럼없이 앉을 수 있었다. 야산의 잡석과 덤불 속에서 여기저기 미니 폭포가 쏟아 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비경 ‘플리트비체’ 한 모퉁이에 불과한 규모지만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하얀 포말은 감탄하기에 충분했다. 에크멕과 닭고기, 차이로 금방 테이 블이 차려졌다. 우리도 버스 타기 전에 산 포도가 있어 꺼내 놓는다. 그날 우리는 어디에서도 좀처럼 받기 어려운 환대 를 받았으니…. 들고 있던 물병을 기울여 물을 마시면 플라 스틱 컵이나마 내놓고, 휴지 한 장을 쓰고 나면 득달같이 휴 지를 리필해 놓고, 급기야 물티슈가 나오고, 학교에서 영어 를 배우는지 5학년쯤 되어 보이는 큰애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영어 단어를 꺼내 놓는다.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산 아래 마을을 가리킨다. 그러고는 자기 집에 가잔다. 가족 모임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 같아 일어나며, 할 머니와 살짝 껴안고 양볼을 맞대기까지 한다. 이 사람들은 정말이지 일순간에 무장해제를 시켜 버린다. 그러니 제주의 어느 해변에서 동네 사람들이 야유회를 나온 듯 커다란 천 막을 치고 고기를 굽는 곳을 지나치며, 이런 말을 한 것은 진심이었다. 섭지코지 언덕을 내려가 말들이 풀을 뜯는 곳 옆이었고, 그날따라 딸과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튀르키예였으면 우리보고 먹고 가라고 붙들었을 텐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