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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유토피아일지도 놓여나면 무엇을 할까

by essay6653 2025. 3. 12.

크루즈 유토피아

 

 

1. 크루즈, 제일 싼 선실 한 번 타봤을 뿐이지만

 

사람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유럽여행’은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다. 무슨 무슨 설문조사에서 몇 번 그런 결 과를 보기도 했고,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러했고, 나도 그랬으 니까. 나는 미국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지만 유럽은 꼭 가보 고 싶었다. 유럽에서도 이탈리아에 가장 큰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막상 가본 이탈리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 억을 다 모아도 베네치아 하나를 당할 수가 없다. 베네치아는 어찌나 환상적이고 독보적인지 꼭 독립된 나라 같았다. 베네치아의 자극이 너무 심하고 미로처럼 얽힌 운하가 갑갑해서 산마르코광장으로 나갔을 때였다. 성당과 두칼레궁전, 오래된 카페와 살롱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홀’처럼 보여,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칭했다는 곳. 2013년 6월의 어느 날, 그 넓은 광장의 절반을 인파가 메우고 있었다. 전 세계 사람이 소 풍 나온 형국이었다. 광장 옆 해안은 더했다. 새파란 하늘과 짱짱한 햇살 아랫사람들이 시위대처럼 빠글빠글했다.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 하나같이 들떠 있었고 나도 점차 고조되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 다. 그때 천천히 크루즈가 다가왔다. 엄청나게 컸다. 뒷동산만큼 큰 데다 선실마다 발코니가 있어 고급스러웠다. 발코니마다, 그리고 꼭대기 갑판에 새 카맣게 사람들이 붙어 있었다. 꼭 개미 떼처럼 많았다. 크루 즈에 탄 사람들이 해안에서 빠글거리는 사람들과 마주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윽, 세상은 아름다워! 마치 급소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찬란한 장면이었다. 살면서 어느 정도의 불화나 고난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삶의 본령은 이 처럼 찬란한 것이라는 것, 그러니 먹고 마시며 즐기라는 것, 머지않아 하루가 저문다는 것을 그날의 장면이 내게 각인시 켜 주었다. 크루즈에 대해 그런 인상을 갖고 있었기에 2015년 5월 튀르키예에서 크루즈를 타게 되었을 때 살짝 흥분했다. 튀르키예 서부의 쿠샤다시에서 출발해 그리스의 밧모스, 크레타, 산토리니, 미코노스를 둘러보는 3박짜리였다. 12층, 꼭 대기 갑판에 조그만 풀장이 두 개, 식당 세 개, 바가 일곱 개, 정원 1600명이라 했다. 물론 산마르코광장에서 본 크루즈보다 아주 작아서 친근하게 느껴졌다.

 

 

 

2. 어쩌면 이 공간은 유토피아일지도

 

선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서너 평 되려나. 침대 두 개와 옷장, 샤워부스가 딸린 화장실이 있는데 지낼 만했다. 우리 선실은 창문이 없고, 3박에 53만 원이었는데 얼리버드로 싸 게 구입한 가격이라고 했다. 숙박과 이동, 식사 일체를 포함 한 가격이고, 크루즈가 엄청 비쌀 것이라고 생각해오던 것에 비해 저렴해서 의아할 정도였다. 길을 찾다 잘못 들어선 적이 있는데 스위트 선실이 있는 층은 복도 자체가 넓고 고 급스러워서 내가 이용한 선실이 제일 저렴하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는데도 살짝 충격을 받았다. 하루에 8유로 정도의 무적인 팁도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선실 가격은 대중적으로 정해 놓고 기항지 투 어로 보충하는 것 같았다. 크레타, 산토리니 같은 기항지에 보통 4시간씩 머물렀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라 크루즈 측이 제공하는 투어에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다. 투어 비용이 한 곳당 6, 7만 원으로 네 군데 기항지 투 어를 모두 신청할 경우 합산 경비가 꽤 올라간다. 여기에 음료 패키지가 있다. 무알코올은 5만 원, 알코올 은 8만 원 정도인데 나는 알코올 패키지로 했다. 그 정도 차이면 알코올음료가 이득이라는 생각이었는데 기대했던 레드와인이 싸구려 한 종류뿐이라 실망이 컸다. 쓸 만한 것 은 별도로 팔고 있었고 맥주도 유명브랜드는 제외였다. 그 래서 칵테일을 공략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골고루 마셔보 았는데 스트로베리데킬라가 제일 좋았고 ‘바’마다 맛이 달 라 돌아다니며 마시는 재미가 컸다. 커피도 마찬가지라 짧은 기간이지만 에스프레소를 잘해주는 바의 단골이 되기 도 했다. 승선할 때 내 이름이 찍힌 카드를 주는데 기항지에서 타 고 내릴 때 ID카드 역할과 선내 결제를 다 이것으로 한다. 저마다 분위기가 다른 바를 다니며 이 카드만 내밀면 모든 음료가 무한리필! 결국 내가 낸 돈이지만 여기에는 묘한 착 시효과가 있어서 나는 점점 모종의 생각에 빠져들었으니, 크루즈가 먹고사는 것이 해결된 유토피아로 느껴지는 거였 다. 미래 관광산업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크루즈! 그 자체가 자본집약적 산업인 데다 선박의 폐쇄성에서 비롯되는 온갖 로망과 부작용, 유흥과 퇴폐의 온상으로까지 여겨지는데, 제일 싼 선실 한 번 타보고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이 모순인 것을 알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3. 먹고사는 데서 놓여나면 무엇을 할까

 

내가 탄 크루즈에는 뷔페식당 두 개, 고급식당이 한 군데 있었다. 아침을 제외하고는 매번 코스요리를 주문할 수 있 었고, 정장을 한 종업원들이 돌아다니며 물 잔을 채워주니 그 정도면 고급식당이라고 불러줘도 될 듯하다. 뷔페식당이 야 흔하니 주로 코스요리를 먹기로 했다. 아침에는 이 식당 도 뷔페식으로 나오는데 다른 뷔페식 당보다 가짓수는 적지만 훨씬 정갈하고 고급스러워서 내 만족도는 최고였다. 예를 들어 달걀프라이는 내 생애 최고였다. 싱싱하고 풍미 가 득한 반숙을 호로록 넘길 때마다 이거 내가 아는 달걀 맞아? 를 되뇌었으니 아무래도 우리네 닭공장 체제와는 다른 사육 환경에서 닭을 키우나 보다. 메뉴 고르는 재미가 컸다. 딸과 나는 심사숙고 끝에 메뉴를 정하고 맛을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사흘 내내 점심과 저녁마다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해서 이런 과정을 세 번씩 오롯이 즐겼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아무 걱정이 없었으 니 그 식당은 어찌 된 것이 디저트는 물론 메인 요리까지 새 로 가져다주었다. 필리핀과 인도 등지에서 온 웨이터들은 하나같이 명랑하고 친절했지만 그들 직권으로 될 일 같지는 않고 식당의 방침 자체가 여유로워 보였다. 스테이크도 나쁘지 않았지만 딸과 내가 동시에 만족한 요리는 돼지고기로 치즈를 싸서 튀긴 음식(나중에 다른 곳에서 보니 ‘코르동 블루’)이었다. 딸은 다른 요리를 시켰는데, 둘이 코르동 블루를 나눠 먹다가 아쉬워하자 그새 낯이 익은 웨 이터가 말 한마디 없이 리필해 주었다. 맛있는 음식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웨이터들의 환대로 해서 마치 내가 귀한 사 람이 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사람이 밀리는 곳이니 오는 순서대로 6인용 테 이블을 채우는 식이라 주로 합석을 했는데, 나는 같은 테이 블에 앉은 사람들보다 웨이터들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한쪽에서 최고의 휴가를 보내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감정노 동에 시달리는 게 안쓰러워서였다. 헬로! 하고 인사를 건네 자 깜짝 놀라던 필리핀 사람과 미소가 환하던 인도인이 기 억에 남는다. 별로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식사하면서까지 영어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인사만 나누고는 주로 딸과 담소를 나누었 다. 그런데 미국에서 혼자 왔다는 패트리샤와는 제법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82세. 씩씩한 할머니를 응원해드리고 싶었다. 마침 그날은 일본인 남성과 튀르키예 여성이 모두 혼자 온 경우라서, 낯선 사람들과 사귀는 데 크루즈가 최적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항지 투어를 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적은 숫자가 아닌데 어떤 바는 텅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 음료 한 잔을 시켜 놓고 넓은 공간을 독차지하고 있다 보면 여기가 어딘가, 어이없을 정도의 넉넉함에 놀라곤 했다. 갑판에 나 가면 짙푸른 바다, 바다, 바다뿐이라 먹고살기 위해 늘 바쁘 고, 긴장과 경쟁이 지나쳐 악다구니를 쳐야 하는 내 나라가 도대체 어디쯤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날 아침, 서운한 마음으로 내다보니 사흘 전 배를 탔던 항구로 정확하게 돌아와 있었다. 배를 타기 직전에 들떠서 사진을 찍던 부두를 홀로 지키는 귀베르진 섬을 바라보며 착잡한 감회에 젖는다. 소풍이 끝난 것이다. 그래도 크 루즈의 인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곳은 일시적이나마 생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해결된 시공간이었다. 내가 자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움직여 도시를 이동하는 번거로움까지 해결해 준 크루즈. 그리하여 크루즈는, 먹고사는 것이 해결된다면, 아니 먹 고사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생존을 위한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철학적 질문을 안겨주었다. 혼자 여행 온 할머니를 비롯해서 한 배에 탔던 사람들, 아니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에게라도 좀 더 친절하게 마음 문을 열 것을…. 우선 그 생각은 든다. 그 강렬했던 질문에 대한 대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꼭 다시 한번 크루즈를 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