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정신의 덩어리, 오스트리아 빈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웃음소 리밖에 알지 못하는데 빈에 발을 디딘 순간 모차르트 때문 에 감격스러웠다. 내가 빈에 오다니…. ‘도나우강’ 앞에 섰 을 때도 그런 감회가 일었으니 우리가 성장기에 너무 서구 위주의 교육과정을 배우고 있나? 어쩌다 외국인과 우리나 라 이야기를 할 때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리만의 것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음악의 도시 빈에 왔으니 오페라를 한 편 보자. 중고시절 내내 음악 시간이 가장 고역스러웠던 음치인데도 그런 생각을 했다.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의 하나라는 비 엔나 오페라 하우스의 위용이 대단하다. 묵직한 석조건물에 070 모처럼 문화생할 071 더해진 세월의 힘이 절로 느껴진다. 그 건물 벽에 기대어 다 섯 시간이나 줄을 섰다. 매일 오페라 공연이 있고 운 좋게도 <카르멘>과 시간이 맞았는데, 좌석이 없어서 입석 줄을 선 것이다. 12유로에서 200유로까지 한다는 1700석의 좌석은 매진되었고, 입석 500여 석을 판단다(2013년). 입석에도 레 벨이 있는지 2~4유로짜리가 있는데, 고급예술을 향유하는 기회를 그까짓 입장료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주 진취적이라고 하겠다. 이래서 여행이 좋은 거겠지. 중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오페라를 보기 위해 기다린 다섯 시간은 아직까지도 소중한 기억이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사 람들은 현지의 중년으로 보였는데, 낚시 의자를 들고 다니 며 앉아서 기다리는 모습에서 오페라 하우스에 거의 출근하 는 포스가 느껴져 이들만 따라가기로 한다. 그날 비가 내렸 다. 어둑해지는 때 중후한 석조건물을 배경으로 우비를 입 은 마부가 관광 마차를 모는 모습이 고전 영화의 한 장면 같 아서 내가 영화 속에 들어온 양 마음이 설렜다. 외부의 위용에 비해 정작 실내는 한눈에 들어오는 규모 라 모든 관객의 시야를 보장해 주는 구조였고, 우리는 다섯 시간 줄을 선 보람이 있어 좌석 바로 뒤, 입석으로는 첫 줄 에 서게 되어 앞사람 뒤통수 걱정 안 하고 관람할 수 있었 다. 40~50분 공연하고 20분 쉬니 다리도 버틸 만하고. 입석 줄을 효율적으로 세우기 위해 가드레일이 있는데 다들 거기 에 스카프나 손수건을 묶어서 자기 자리를 표시해 두기에 우리도 따라 했다. 뭘 해도 재미있어서 연신 킥킥 소리가 나 왔다. 거의 객석만큼 큰 무대에 많으면 백여 명이 나오는 스케 일이라 ‘막귀’에도 음악이 들린다. 워낙 유명한 오페라다 보 니 익숙한 노래가 서너 곡 되고, 딸은 중학교 음악 시간에 DVD로 본 작품이라 다 기억난다며 희희낙락한다. 성량의 한계라곤 없는 주인공들의 아리아도 놀라웠지만 뜻밖에 오 케스트라의 연주가 귀에 감긴다. 코앞에 오케스트라가 있다 보니 지휘자의 섬세한 손가락 놀림이나 돌연 폭발하는 팔 동작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연주자들이 다 느껴져 여간 재미 있는 게 아니다. 음악이 편안하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을 느 끼며 몰입했으니 난생처음으로 클래식의 위력을 체험한 셈 이다. (다음해에도 빈에 갔는데 그때는 푸치니의 <토스카>와 베르디 의 <일 트로바토레> 두 편을 보았다고 메모에 적혀 있다. 그런 일이 있 었는지 너무 낯설어서 메모를 보고 당황할 지경이었는데 열심히 머리 를 굴려보니 그때는 좌석에 앉아서 보았고, 작품 선정기준은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키스>에서 뿜어져나오는 금빛 아우라
다음 날에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만 쓰이고 있고 클림트의 <키스>를 비롯해서 에곤 실레의 작품 등 수많은 명화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근 일주일이 나 이슬비가 내리던 날씨가 딱 하루 맑았다. 먼지 한 톨 없 이 맑은 날, 위아래 두 동으로 이루어진 궁전과 그 사이 클 래식한 정원에서 크고 작은 분수가 물을 뿜어 올리는데 정 말이지 환상적으로 아 - 름 - 다 - 웠 – 다 - 벨베데레 궁전 안에서 결혼식을 허용하는 듯, 한 신랑 신 부 커플과 내내 동선이 같았다. 꽃이나 위스키병을 들고 따 라다니는 십여 명의 하객이 전부인 것을 보니, 말도 안 되게 거창하고 번거로운 우리네 결혼식이 떠올랐다. 어디에서나 결혼식 풍경은 예쁘고 흥겨운 것이라 그날 신부의 웨딩드레 스는 그림 같은 풍경을 화보로 완성시켜 주었다. 클림트의 <키스>는 겹겹이 꺾어져 들어가는 궁전의 내실 에 철통같은 경비 속에 가장 귀하게 모셔져 있었다. 길쭉하 니 제법 큰 그림에서 금빛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너무 많 이 복제되어 식상할 정도인 그 <키스〉가 아니라 처음 보는 그림같이 오롯했다. 우아한 벨베데레 궁전에 딱 어울리는 그 림이었다. 원화의 위력을 느낄 수 있어서 감동이고, <키스> 말고도 클림트의 다른 그림들이 충분히 좋아서 신이 났다. 비슷한 배치의 <브리지>도 소박하고 정감이 있었고, 내 가 편애하는 풍경인 개양귀비 깔린 들판 그림도 아주 좋았 다. 개성 만점인 에곤 실레의 그림은 물론이요, 따분하다고 생각해오던 리얼리즘 계열의 그림조차 말을 걸어온다. 책 읽는 소녀처럼 흔한 콘셉트의 그림인데도, 어쩌면 이토록 섬세하게 우윳빛깔 피부를 표현했을까 하며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게 빈은 나의 도시가 되었다. “음악의 수도(The capital of music)”라거나 “2000년 동안 국가를 넘어선수도”, “거대한 정신의 덩어리”라는 찬사를 듣는 빈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재일학자 서경식이 십 년 동안 잘츠부르크의 음악축제를 관람하며 문화적 향수와 일상의 호사를 누리는 것을 보았 다. 여행을 가면 딸은 하나라도 더 보려고 강행군을 하고, 나는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며 천천히 그곳의 분위기를 흡 입하고 싶어하는데, 그런 내 스타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곳 이 빈이다. 언제고 다시 가고 싶은 곳 일 순위 빈. 참, 도나우강이 푸르더냐고? 2013년에 닷새 머물 때는 빈의 5월 날씨가 그런지 계속 흐리고 우중충한 가운데 내가 본 구간은 녹조현상이 심했다. 어릴 때 배운 가곡의 제목을 배반해서 서운했는데 다행히도 다음해 6월의 도나우강은 눈부시게 파랗고 아름다웠다. 주말이라 보트와 요트가 가득 했고, 옛날에 시골에서 보던 시냇물처럼 말갛게 속이 비쳐 감탄했다. 그 강가에 자전거를 타고 와 수영 한 판 하고 일 광욕을 하고 있는 동네 아저씨, 사춘기가 시작된 듯 우산 속 에 새침하게 앉아 있는 소녀, 노출을 못 해서 안달 난 젊은 여성들의 모습 모두가 인상적이었다. 평화와 여유가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