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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베네치아 다 산 것 같은 이 기분

by essay6653 2025. 3. 12.

세상의 끝, 베네치아 다 산 것 같은 이 기분

 

세상의 끝, 베네치아

 

어떻게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 수 있을까. 사진으로 많이 봐 서 짐작은 했지만 직접 본 베네치아는 환상의 극치였다. 이 탈리아라는 수식을 붙이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독보적인 베 네치아는 완벽하게 아름다운데 생명의 기미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건물이 물에 떠 있고, 그 사이를 미로같이 좁 은 운하가 연결하고 있다. 집집마다 작은 보트가 있고, 커다 란 짐을 실은 보트가 오가는 것으로 보아 보트가 중요한 생 활수단임이 분명한데도 천천히 미끄러지는 곤돌라는 산 채 로 탄 꽃상여같이 아득했다. 궁전인지 성당인지 둥근 지붕 의 아름다운 건물이 천연덕스럽게 바다에 떠 있는 장면은 영화 <트루먼쇼>처럼 저 끝자락이 도르르 말려 있을 것 같 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세상의 끝, 판타지의 끝, 퇴폐미의 완성…. 이틀 머물기 도 어지러웠다. 아무리 유명 관광지라고 해도 현지에 뿌리 박고 사는 주민이 있어 생활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베네 치아에서는 그걸 조금도 느낄 수가 없는 탓이다. 영화 세트 장 같고 아예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에 피로했 다. 아예 죽음의 냄새가 났다. 6세기에 조성된, 무수한 섬으 로 이어진 지대에 떡갈나무 기둥 수백만 개를 박아 만든 놀 라운 섬의 도시는 지금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니 죽음과도 잘 어울린다. 마침 베네치아에 묻힌 유명인 한 사람이 내 상 상력을 뒷받침해 준다.

 

다 산 것 같은 이 기분

 

페기 구겐하임. 타이타닉호에서 사망한 부친의 유산을 상속한 그녀는 부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했다. 하 루에 한 점씩 미술작품을 사들였다든가 꾸준히 컬렉션을 하 며 가난한 화가들을 지원해 현대미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 욕으로 옮겨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브라크, 달리, 막스 에른스트, 자코메티…. 그녀가 애정한 화가들이다. 그중에서 도 특히 잭슨 폴록의 진가를 알아보고 발굴한 것으로 유명 하다. 그녀는 열네 살에 세기적인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 고, 세 번의 이혼 경력을 갖고 있으며, 오십 살에 베네치아 에 정착해 살다가 그 집 정원에 잠들어 있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는 짧게 배를 타야 했다.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햇살에 부딪히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지는 날이라 미술관 주변 풍 경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관광객이 바글거리는 본섬에 비 해 한적하고 우아해서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살던 집을 개 조했으니 탁 트인 미술관 홀이 아니라 주택의 작은 방이 조 촐하게 이어지는데, 피카소, 샤갈, 르네 마그리트가 남긴 명 화가 즐비하다. 도슨트에게 그림 설명을 듣고 있는 초등학 생을 두 팀이나 보았다. 땅이 부족한 탓이겠지, 부호의 집이라기엔 조촐한 정원 에 페기 구겐하임은 애견 열네 마리와 함께 묻혀 있다. 아무 런 장식도 없이 “PEGGY GUGGENHEIM, HERE RESTS” 라고 쓰인 명패가 그 어떤 화려한 컬렉션보다 심금을 울린 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등실 고객이라 먼저 구명정을 탈 수 있었음에도 남들에게 양보하고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영화 에서 악단에게 연주를 하게 하고 술잔을 들던 인물이라고 한다. 아버지 못지않게 영화 같은 삶을 살다 간 페기 구겐하 임, 이야기 속에 살다가 표표하게 사라진 그녀가 택한 죽을 자리, 베네치아. 자극이 너무 심한 탓일까. 딱 이틀 배정한 것이 아까워 환상적인 풍경을 너무 열심히 째려본 탓일까. 좀 지치는 기 분. 이제 막 도착했는지 허술한 장면에 카메라를 눌러대는 사람들을 보니 다 산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