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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두 악동, 클림트와 에곤 실레 (빈 레오폴드 미술관)

by essay6653 2025. 3. 19.

클림트와 에곤 실레

 

 

세기말의 두 악동, 클림트와 에곤 실레 (빈 레오폴드 미술관)

 

 

빈의 레오폴드 미술관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두 화가 클림트 (1862~1918)와 에곤 실레(1890~1918)에게 헌정된 미술관 같았 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높은 곳에 크게 걸린 두 사람의 초 상화는 일단 멋있었고, 그다음에는 부러웠다. 누구에게나 유한한 인생, 나의 사후에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내 작품을 관람하고 이야깃거리로 삼는 일은 얼마나 대단한가. 클림트는 평생의 연인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와 나란히 걸 려 있고, 실레는 혼자 걸려 있다. 아무리 대단한 뮤즈라고 해도 화가와 동격으로 대우를 해준 것이 놀라워서 검색해 보니, 흥미롭게도 클림트는 에밀리와 플라토닉한 관계였다 076 모처럼 문화생할 077 고 한다. 모델과 동침하는 것이 기본이어서 무려 14명의 사 생아를 낳았다는 클림트가 에밀리와는 사업 파트너요 여행 동반자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 에밀리에게 엽서를 보내 시시콜콜 근황을 알리곤 해서, 레오폴드에도 엽서 수십 장이 보존되어 있다. 선정적인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에곤 실레도 아내의 초 상화는 통념적으로 그렸다고 하니, 그 시대에는 보편적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두 사람이 유독 성과 여자에 대해 이분법적 인 사고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둘 다 아카데미 예술에 반하여 태동한 분리파와 아르누보(Art Nouveau, 새로운 미술)의 핵심이었다. 클림트는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주문 제작한 벽 화를 거부당한 적이 있고, 실레는 모델들과의 음탕한 관계로 해서 동네 사람들의 질타를 받다 못해, 한 모델의 고발로 철 창신세를 진 적도 있다. 클림트가 실레의 스승이었다. 레오폴드에 클림트의 그림이 많지는 않다. <키스>와 <유 디트> 같은 대표작은 벨베데레 궁전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 고 있다. 그래도 클림트를 진짜 만난 것은 이곳 레오폴드에 서이다. <장미가 있는 과수원>같이 잔잔한 소품도 맘에 꼭 들었고, 개인 소장이라며 비디오 화면으로 소개된 작품에서 도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제목은 메모를 안 했지만 클림트의 주요 기법인 모자이크 방식으로 수면의 일렁임과 풀잎의 정 교함을 표현한 그림이 하도 영롱해서 오래 들여다봤다. 비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사실적인 그림보다 더 리얼해서, 결과 적으로 클림트만의 화풍을 확립한 것에 매료되어, 클림트가 정말 잘 그리는 화가인 것을 알게 되었다. <다나에>도 순정하고 풋풋한 관능미를 잘 드러내주고 있 어서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이 작품은 전시공간에는 없 고 기념품 가게에 걸린 복제품으로 만났는데도 그 감동이 줄어들지 않았다. 꿈꾸는 듯 몽환적인 소녀의 표정과 물결 치는 머리, 튼실한 허벅지, 사실적으로 표현된 망사 커튼 모 두 대단해서 클림트가 <키스>만의 화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에곤 실레의 그림은 전시실 두 개를 채울 정도로 많았다. 화집을 통해 익숙한 자화상들, 이상하게도 그가 그리면 모 든 것이 음습한 에로티시즘을 유발하는 <엄마와 딸>, 당연 히 도발적인 <교황과 수녀> 같은 작품을 보았다. 나는 실레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심리적 이고 노골적이어서 조금 불편하다. 그의 작품은 말을 건다. 그리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러브메이킹>만 해도 은밀 한 행위를 하던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들의 침실이 공개되었다는 것 아닌가. 진품이라고는 해도 대부분 크기가 작고 삽화 스타일이 라, 화집을 보는 것 이상의 감동을 받지는 못하던 차에 한 점의 드로잉에서 숨이 멎었다. 청순한 얼굴이 무언가를 갈 구하고 있고, 팔다리도 없는 육체는 한없이 위험했다. 먹으 로 몇 번 슥슥 오간 것만으로 숨 막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그가 천재 아니면 무엇이려나. 나는 단순한 선 몇 개가 빚어내는 에로티시즘이 놀랍고 부끄러워 몇 번씩 시선 을 피했다가 다시 돌아보곤 했다. 우연히 본 현대무용극은 하필 클림트와 실레에 대한 이 야기였다. 무대장식이 실레의 그림으로 이루어졌고, 동성애 를 포함한 성행위 묘사며 파티 장면, 그림을 그리는 장면들 이 이어졌다. 그 연극은 여러 분야에서 두 화가에 대한 재해 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사람은 화려 한 관능미로, 다른 사람은 음습한 자의식과 더불어 표현한 성애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레 이전에는 모 든 누드모델이 비너스 형태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실레가 처음으로 모델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화가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갖은 해석과 비평은 후대인의 일이요, 그 두 사람은 그저 자신의 관심사 를 좇아 표현하고 또 표현한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클림트, 이 허름하게 생긴 사내는 수많은 기념품을 통해 자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세련되고 화려한 화풍으로 보 아 오래도록 대중적 인기를 누릴 것이다. 이쯤 되면 땅속에 누워 있어도 외롭지 않겠다. 실레는 스승 클림트의 죽은 모습을 그렸다. 스페인 독감 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지 불과 사흘 후 자신도 같은 병 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만 보아도 그에게는 그림이 모든 것 을 뛰어넘는 존재론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심 리적인 그림을 그렸으므로, 오랫동안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심층 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 에곤 실레